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문단 편집) ==== 내각 3기 ==== 앞서 말했듯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1999년 중반에 연정을 때려치고 나가버리자 그 어떠한 정당도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우세를 쥐지 못해 1999년에 새 총선이 실시되었다. 1999년 총선은 [[카길 전쟁]] 바로 직후에 치러졌는데, 카길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해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바즈파이 정부와 인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정점에 달해있던 덕에 인도 인민당은 전체 543석 가운데 330석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둔다. 바즈파이 총리는 1999년 10월 13일 세 번째로 총리 취임선서를 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카길 전쟁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무난하게 총리로 취임한 바즈파이였지만 역시나 여러 국내외적 난관에 봉착한다. 가장 대표적인 건 취임 후 몇 달도 안되어 터진 인도 항공 IC 814편 납치 사건이었다.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1999년 12월 [[카트만두]]에서 [[델리]]로 향하던 비행기를 납치한 후 이들을 볼모로 잡고 테러리스트들을 인도 감옥에서 석방할 것을 요구한 것.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던 인도 정부는 이에 굴복해 테러리스트 일부를 석방하고 대신 승객들을 돌려받았다. 카길 전쟁으로 급격히 관계가 나빠졌던 [[파키스탄]]과도 관계회복을 위해 나름 정상회담을 진행하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카슈미르]] 문제에 이견이 터져나오면서 별다른 해법은 거두지 못했다. 다만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고 2003년에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22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인도를 국빈방문하기도 했다. 집권 2년차인 2001년에는 인도 국회의사당이 무장한 괴한들에게 점거되는 사건이 터졌다. 괴한들은 국회 경비원들을 죽이고 건물을 죽이고 건물을 장악했지만 인도 군경이 총동원되어 제압한 덕에 얼마 못가 사살되거나 체포된다. 문제는 이들이 '''파키스탄 국적'''의 젊은 남성들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안그래도 카길 전쟁으로 악화되어있었던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급경색에 들어갔고 바즈파이 총리는 50만~75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하며 노골적으로 파키스탄을 위협했다. 자칫하면 정말 또다른 전쟁이 터질 위기였기에 전세계가 나서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뜯어말렸고,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를 받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군대를 물리는 데는 합의했지만 양국 간의 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이후에도 바즈파이 총리의 재임기간 내내 인도와 파키스탄의 외교 관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재임기간 내에 인도에서 일어난 최대 사건은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2월 27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힌두교도들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고드라 마을에 정차했는데, 이와중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간에 싸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화재가 발생해 수 십여 명의 힌두교도들이 불타사망한 사건이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아마드바드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었으며 이 무책임한 조치는 해묵은 인도의 힌두-무슬림 사이의 악감정에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격분한 힌두교 폭도들이 [[구자라트]] 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수 천명의 무슬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최소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와중에 구자라트 주 총리였던 [[나렌드라 모디]]는 상황을 방관하기만 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모디가 강경 힌두 성향이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가 일부러 상황을 방치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바즈파이 총리 역시 폭동 직후 '무슬림들은 타 종교인들과 공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내뱉으며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욕을 들어먹었다.[* 바즈파이 총리는 2004년 총선에서 [[인도 인민당]]이 대패하자 구자라트 폭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해임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폭동이 가라앉고 난 후 바즈파이 총리는 집권 후반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경제성장에 집중했다. 주로 외국인 직접투자 장려, 정부 소유 기업의 민영화 정책, 국가 부정부패 일소 밑 경제 개혁 정책들을 중점으로 펼쳤고 덕분에 인도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7%에 가까운 고공성장률을 보였다. 열악한 인도의 도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국도를 깔고 정비하는 국책사업도 벌였으며 초등, 중등 학교의 교육의 질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집권 후반부에 [[중국]]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2003년 7월 중국을 국빈방문해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던 덕이 컸다. 중국은 보답으로 [[시킴]] 지방의 인도 영유권을 인정했고 중인관계는 급속도로 호전된다. 그외에도 집권 말까지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긴 했고 군사적 적대행위도 일시적으로 중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